[분단의 진실]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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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승만이 정읍발언(1946.6.11/남한단독정부수립)을 하기 전 1946.2월 이미 북에서는 소련군과 북조선공산당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립한다.
이 기구는 얼마 안가 이름에서 '임시'를 떼고 정식으로 활동하는데 남한보다 훨신 빨리 헌법 논의를 시작했고 군대를 창립한다. (이러한 내용도 교과서에 있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불가피한 것이었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승만이 분단의 원흉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 뭐가 분단의 원인이었을까?
첫번째 원인은 신탁통치를 하자라고 언급했던것과, 두번째 원인은 신탁통치를 하기위해 북한을 점령해 38선 군사분계선을 분단선으로 만들어버린 소련이었다.
그 배경을 설명해본다.
먼저 분단과 관련된 1948년 이전 상황을 간략히 살펴보면, 1943년 무렵 제2차대전의 연합국측은 전쟁이 승리로 끝날것을 확신을 가지고 종전 이후의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1943년 카이로회담을 연다. 여기서 한반도 문제가 처음 논의되고 "전쟁 끝난 후 조선을 바로 독립시키지 않는다. 대신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라는 결론을 얻는다.
그리고 회담 말미에 루스벨트는 소련에게 대일본전에 참전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미국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다. 소련은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게되면 자신들의 주장할 몫이 줄어 들것을 예상하고 외몽고,만주,한반도동북단,남부사할린,쿠릴열도에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다.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를 단독으로 점령하는 사태를 막기위해 '일반명령 1호'를 공표한다.
그것은 38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는 것이다. 이렇게 군사분계선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군사분계선이 바로 국토분단선은 아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서독지역에 미,영,불 3개국 간의 군사분계선은 분단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미,소,영,불 4개국 군사분계선도 말 그대로 군사분계선으로 끝났다. 그러나 소련이 군사분계선을 국토분단선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분단에 직접적인 원인이 소련이라는 것이다.
그럼 소련이 한반도에 무슨짓을 했느냐?
통신과 교통을 끊었다. 김일성을 앞세워서 토지개혁을 시행했고 산업을 국유화했고, 교육정책을 새로 올렸고 주민사상 개조운동을 했다.
남쪽과 북쪽 주민의 생활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미국은 통신,교통의 재개와 주민의 자유왕래를 요청하지만 보기좋게 거절당한다.
소련은 북한 땅에 대한 물리적인 지배를 원했던 것이다. (미국이 남한을 군사기지화,식민지화 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건 틀린주장이다. 제국주의세력은 영토를 접수하는게 공리적으로 타당하지않다는 사실을 전쟁이후 깨닫는다. 그들에게 필요한것은 영토가 아니라 시장이다. 경제적으로 자립한 나라가 자신들의 상품을 구매해주길 바라지 그 나라에 공장을 세워 물건 만들 생각은 안한다.)
미국도 일본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어떻게 하나. 일본을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만들려는 동북아 정책을 핀다.
미국을 향한 일본의 구매력을 높이려는 것이다.
미국이 남한을 식민지화 하려 했다면 미국이 한반도에서 왜 나갔을까. 애치슨선언에서 국토방위선에서 왜 남한을 제외시겠냐고.
그리고 미국의 남한 식민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미국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하려고 했다고 얘기하는데, 그러기는 커녕 미국은 남한에서 공산당과도 타협적으로 잘 지낼 수 있는 제3의 중도세력을 육성하려고 이승만을 연금까지 시켜서 까지 갖은 노력을 다한다. (좌우합작종용,조미위원회,과도입법의원).
단독정권을 수립하려는 이승만과 김구를 정계에서 빼버리려고 했다. (미국이 입장을 선회한 것은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에 빠진 1947년 9월 이후)
그리고 이승만의 '정읍발언'을 단독정부를 공식적으로 주장했다는 발언으로 문제시 여기며 분단의 원흉으로 생각한다. 이때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신탁을 논의하던 기간이고 찬탁,반탁으로 의견이 분분하던 때였다.
실제로 이승만은 1946년 4월부터 6월까지 지방순회여행을 하면서 단독정부수립의지를 밝히며 5차례 반탁강연을 한다.
'반탁이 관철되지 않으면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그렇게 되면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워 병력으로 38선을 깨뜨리고 소련군을 내어쫒고 북조선을 차지하겠다' 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암살 위험으로 여행을 꺼렸지만 그러한 위험을 무릎쓰고 강연을 한다. (실제로 이승만 암살사건을 음모한 범인 7명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왜 확신을 가지고 이러한 정치적은 모험을했을까?
그 이유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에 있다. 무슨얘기냐면 1946년 2월 소련군과 북조선공산당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립한다. 해방 후 겨우 반년 지나 이미 국가 기구를 만든것이다. 이 기구는 얼마 안가 이름에서 '임시'를 떼고 정식으로 활동하는데 남한보다 훨씬 빨리 헌법 논의를 시작했고 군대도 창립한다. 또 이 위원회는 북조선의 인민, 시민단체, 국가기관이 실행할 임시 법령을 제정하고 발포할 권한을 갖는다고 밝혔다. 토지개혁까지 강행하여 무상몰수를 했으니 사실상의 정부라는 반증이다.
김일성은 1946년 2.20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제 1차 회의에서 "지난 2월 8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됨으로써 우리 인민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중앙정권기관을 갖게 되었다"고 연설한다.
이승만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할 동안 이미 북에서는 차근차근 정권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남한까지 공산화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가운데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를 면하게 하겠다는 발상이었다.
세계사적 흐름과 공산주의의 본질을 파악한 이승만에게는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이승만이 얼마나 세계정치흐름에 깨어있었냐면, 25세때 청일전기를 쓰고 일본의 진주만공습을 예언한 '재팬인사이드아웃'을 쓴다)
정리하자면 북한은 남한에서의 단독선거인 48.5.10일 선거가 실시되기 1년전 이미 단독선거를 실시하고 단독국회를 구성하고 단독정부를 만들었다.
(이것은 명백한 분단 확정이다)
이 다음 뒤늦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을 두고도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이라고 모는것은 악의적인 왜곡이다.
[출처] 이승만 깨기 (저자: 남정욱 교수) 발췌요약 3.이승만은 분단의 원흉이다?|작성자 dkenl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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