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부정선거의 진실] 이승만은 부정선거로 당선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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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부통령 선거였다
“대한민국에서는 도둑이 될 수 있다/대한민국에서는 거지가 될 수 있다/.../세상은 자유당의 것/사사오입으로/3선개헌 완료하고” - 고은 만인보 제17권 수록 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그 지긋지긋한 놈의/대한민국사진을 떼어서/조용히 개굴창에 넣고/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 김수영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시인 고은, 김수영과 같이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에 따르면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영구집권과 종신 대통령을 꿈꾸는 독재자 중의 독재자다. 중임제한 철폐로 헌정을 어지럽혔고, 그 결과 3.15 부정선거라는 악의 꽃을 만들어 냈다는 관념을 대중들에게 전한다. 균형잡힌 역사적 평가에 앞서 사람들 정서에 불을지르고 대중은 이런 문학작품을 통해 이승만을 쉽게 ‘단죄’하곤 한다.
이승만은 말년의 부정선거란 누명, 4.19로 인해 불명예스럽게 하야한 지도자라는 나쁜 이미지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게 현실이다. 그런 대중적이고 속화된 인식이란 게 어디까지가 맞는 얘기이고, 어디서부터 과장된 것일까를 점검해야 한다.
1. 1952년 제2대 정부통령선거 시 직선제로 바꾸기 위한 발췌개헌
이 사안을 두고 이승만에 의한 헌정중단이라는 견해가 다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것은 당시 한미관계, 대통령과 국회 사이의 권력관계 전체를 파악해야 전체 모습이 드러난다. 1952년 5월 미국과,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반(反)이승만 태도를 분명히 하는 국회와 손을 잡고 고분고분하지 않는 지도자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 상당히 위험스러운 비밀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런 최대 위기국면에서 최대한 용트림 한 게 부산정치파동이다. 당시 이승만은 임시수도 부산과 경남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의 일부를 국제공산당 연루 혐의로 구속하는 등 강공책으로 나갔다. 이 기세에 눌린 국회는 대통령 직선제 등 필요한 부분만 골라 절충안을 만들어 국회를 통과시킨다.(발췌개헌) 국회가 직선제개헌안을 인정한 것은 이승만에 강공에 밀린 부분도 있지만, 직선제가 자유선거의 명분에 가깝고 또 그것이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는 점도 무시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이승만은 유권자 과반수를 넘은 74.6%를 얻어 당선되었다.
그가 정말 독재자가 맞다면 당시 아예 선거 자체를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또는 전시상황 국가비상사태를 이유로 얼마든지 선거를 취소하거나 뒤로 미룰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링컨대통령은 남북전쟁 시 국가위기국면에서 헌법에 보장된 인권을 번번히 무시한 채 징집기피자, 적대세력을 지원하거나 호의적으로 대한 자 모두를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처벌했다. 자신의 정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수천명을 재판없이 투옥하고 신문사 발행인들을 체포하였다. 동시에 군인들을 선거에 개입하게 조정했고, 야당 의원들을 의회에서 추방해버리는 일도 버질렀다. 당시 그가 독재자,폭군으로 불린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현재 미국사회가 그를 독재자,폭군이라고 함부로 딱지 붙이지는 않는다.)
2. 1956년 제3대 정부통령선거
이때부터 문제 시 되는 부분이 있다. 이승만이 55.7%의 지지율을 얻고 당선되었으나 전보다 20% 정도 떨어진 상태였고 나이도 80이 넘은 상태였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의(민주당) 장면이 여당(자유당)의 이기붕을 제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어 이승만의 유고시에는 권력이 야당으로 넘어갈 판이라 자유당은 1950년대 중후반 내내 찜찜해했다. 정권 말기에는 이승만의 국정장악력이 느슨해지는 징후와 함께 이기붕 쪽으로 권력의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이런 구조 속에 국가보안법 개정(1958 말), 경향신문 폐간(1959), 진보당 조봉암 사형(1959) 등 굵직한 현안들이 정부의 강공방식으로 처리된다.
3. 1960년 제4대 정부통령선거 (3.15)
3.15 선거는 정부통령 선거였지만 투표 한달 전 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미국에서 서거하며 대통령은 이승만이 단독 출마한 상황이라 사실상 부통령에 대한 부정선거였다. 이승만의 국정장악력이 느슨해서 그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사안에 대한 대통령의 정치적 책임은 있다.
3.15 부정선거는 당과 내각 그리고 경무대 비서실의 합작이었다. 당시 연로한 이승만이 무슨 일을 당하면 부통령이 권한을 이어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서 부정선거를 했던 것이다.
당시 선거를 관장하는 주무부처인 내무장관 최인규는 이기붕이 이끄는 자유당과 함께 1959년부터 투표계획을 세운다. 여기에는 4할사전투표, 공개투표전략, 투표함 바꿔치기 등의 수법이 모두 있었다.
관권이 개입해 구비서류 미비를 이유를 대거나, 서류 강탈등의 수법으로 야당의 후보 등록 자체를 방해하는 방식도 동원되었다.
야당유세장을 텅텅 비우게 할 요량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일요일에도 등교하게 했다. 학생들로 인해 2.28대구학생시위를 필두로 대전-수원-서울-원주 등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투표당일 마산시위 폭발로 연결되었다. 그때 경찰의 발포로 아홉명이 사망했는데, 그 한명이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이다. 한달 여 뒤 4.11일 마산앞마다에서 그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부정선거 비판이 이승만정부 규탄으로 발전했다. 고려대 등 서울시내 대학 거의 전체가 한꺼번에 시위를 벌인 결정적인 분기점이 바로 4.19다. 급속한 여론 악화와 함께 결국 대통령의 하야 성명(4.26)라는 충격적 결과를 빚어냈다.
그러나 이승만은 부정선거와 관련된 소요하태의 전모와 원인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점은 최고 통지자로서의 결격사유로 지목되지만, 거꾸로 부정선거에서 그가 깊숙이 개입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증거로 김주열의 시신 발견 그 다음날 열렸던 국무회의 속기록을 훑어볼 필요가 있다.
이건 두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당시 연로했던 그가 효과적으로 국정 전반을 장악하지 못했을 가능성
둘째, 이기붕이 이끄는 자유당이 선거부정을 지휘-연출했던 총본산
제 36회 국무회의(1960년 4월 12일)
<시국 안정에 관하여>
이승만대통령 : [정부가 잘못하는 것인지 민간에서 잘못하는 것인지 몰라도 아직도 그대로 싸우고 있으니 본래 선거가 잘못된 것인가?] 하시는 하문
이승만대통령 : [나로서 말하기 부끄러운 말이지만 우리 국민은 아직 민주주의를 하여나가기까지 한참 더 있어야 할 것이며 정당을 하여갈 자격이 없다고 본다. (중략)어린아이들(김주열 군을 언급하는 걸로 추정됨)을 죽여서 물에 던져놓고 정당을 말할 순 없으니 무슨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이 대통령을 내놓고 다시 자리를 마련하는 이외는 도리가 없다고 보는데 혹시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들은 일이 없는가?] 하시는 하문
그리고 오히려 마산의 학생 시체 발견에 관한 보고를 받고 발끈해서 말한다.
“부정선거를 왜 한거야? 어린애를 죽여놓고 뭐라고? 공산당 짓이라? 그걸로 해결될 것 같아? 대통령이 책임져야해. 내가 그만둬야 도리이니 후속대책을 빨리 마련하시오” 라며 자진 하야를 암시했다.
또 이승만은 4.19경찰의 발포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태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는 병원으로 달려가 위문하면서도 “불의를 보고도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젊은이들이 장하다” “경찰이 백성을 죽이다니? 나라가 어떻게 백성을 죽일 수 있어?" 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리고 돌아와 ‘국민이 원하면 하야한다’고 전국에 방송한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오늘은 한사람도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 ”내가 그만두면 사람들은 안 다치겠지?" 라며 걱정을 했다.
이후 이승만의 하야는 구체화되고 4.22일 시위 중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을 방문하여 “부정을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은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젊은 학생들이 참으로 장하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도 물러나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 라는 말을 남기고 실제로 하야를 결행한다.
국민이 하야하란다고 해서 그 말을 듣고 순순히 물러나는 독재자를 본 적이 있는가?
또한 퇴임 후 각국 수반의 위로 편지에 대해 이러한 답장을 쓴다. “나를 위로하는 편지는 안 받겠소.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하다오. 부정을 보고 궐기하는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니 이런 날을 평생 기다렸기 때문이요”
그는 1900년대 초 20대 시절에 썼던 [독립정신]이라는 책에서 “조선의 무식하고 천하며 약한 형제자매들이 스스로 각정하여 국민정신이 바뀌기를 원하고 또 원하는 바이다”라고도 말했었는데 이에 대한 실현이라는 점에서 행복하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가 시인 김수영의 삿대질처럼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일 순 결코 없다.
사실 이승만이 이끈 1950년대, 실로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크게 돌아가던 그 전체 모습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너무 가까이에서 19세기 조선왕조 말과 20세기 초 일제 식민시대의 아픔을 겪고, 곧바로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전쟁가운데 전시를 겪으며 60~70년대의 개발연대를 예비하던 그 시기의 시대사적 의미를 쉽게 판독하기란 어렵다.
크게 볼 경우 이승만이 연출한 1950년대란 “퇴영,침체,좌절의 늪이 아니고 한국이 자유, 평등, 민주주의 등 보편적 이상을 향해 전진을 계속했던 시기”라는 근현대사 전공자 유영익 교수의 말이 맞다.(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저)
[출처] 이승만 깨기 (저자: 조우석) 발췌요약 7.이승만은 부정선거로 당선됐나?|작성자 dkenl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