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논란의 진실] 이승만은 독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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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3.15 부정선거’와 ‘개헌을 통한 장기집권’ 때문에 독재자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부정선거’는 대통령선거가 아니라 부통령 선거였고, 1948~1960년의 12년간의 통치기를 당시 사회적 배경을 고려해 독재로 볼 수 있느냐를 평가해봐야 한다.
1) 독재와 민주
먼저 ‘독재’와 ‘민주’에 대해서 살펴본다.
‘독재’는 인간 기본권의 박탈과 배제를 말하고, ‘민주’는 기본권 보장, 공동체 운영에 대한 참여 보장을 말한다.
사실 ‘독재’라는 유형에 가장 부합하는 지도자는 스탈린,히틀러,무솔리니,마오쩌둥,김일성,김정일,김정은,폴포트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독재자가 만들어낸 권력의 구체적 특징은 자의적으로 국민 생명을 짓밟고 국민 재산을 훼손하거나 박탈하는 것이다.(대표적으로 공산주의) 대규모의 학살과 처형이 반드시 동반되며 이러한 방법이 전형적인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런 기준에서 이승만이 ‘독재자’인가?
물론 이승만의 시기는 국민의 기본권적 자유와 민주적 참여의 수준이 서유럽과 비교할 때 성숙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치 발전 수준이 어떤 ‘과정’에 있었느냐(민주공화제의 출발기)를 보지 않고, 현재의 기준보다 미성숙했다고 해서 그 시대를 다 독재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근대 봉건 왕조사회를 다 독재체제라고 평가하지 않는 것은 근대적 기준을 가지고 그 시대를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봉건왕조제와 식민제를 지나 민주주의를 시작하는 시기의 지도자에게 갑자기 성숙한 민주주의의 기준을 적용시킬 수는 없다, 얼마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느냐로 보아야지, 성숙된 민주주의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으로 ‘독재자’라고 폄하될 수는 없는 것이다.
(흑인 노예제를 유지하고 투표권을 주지 않았다고 해서 미국의 워싱턴 대통령이나 링컨 대통령이 독재자로 평가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중국이 현재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유지하는 상황이라고 과거의 덩샤오핑,후진타오나 시진핑을 미래 기준에서 일당독재체제의 독재자로 분류할 수도 없는 것이다. )
2) 1948년 건국은 한국 민주주의 혁명
1948년은 대한민국 건국은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첫째, 민주공화제적 헌정질서의 출발이었다.(국민주권, 헌법과 법률에 의해 통치되는 시대)
둘째, 의회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
셋째, 국민에게 자유와 기회균등이 보장되었다.(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제 폐기, 여성차별과 여성권리의 제도적 배체 사라짐,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 선거권 부여)
대한민국 건국을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주변국이나 동일한 조건에서 출발한 신생국 내지 개도국 중에서 한국이 만들고 정착시킨 수준의 민주주의를 한 나라를 찾기 어렵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중국, 대만, 북한, 몽고(90년대 들어서 민주주의로 전환), 베트남 등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자유민주체제가 진행되지 못했고, 자유선거조차 없는 수준이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의회민주주의와 헌정질서에 의한 통치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같은 조건에 있던 나라들이나 함께 출발했던 주변의 나라들 중 한국만 건국 이후 전혀 남다른 길을 갔다는 것이 바로 1948 건국민주주의의 혁명성을 말하는 것이다.
4.19에 의한 사회변화, 5.16에 따른 경제변화, 5.18 민주화운동에 따른 대통령 직선제 도입같은 정치변화가 있었지만 1948 건국 민주주의라는 혁명성을 넘어설 수 없는 수준이다.
3) 기본권적 자유의 확대과정이었던 1948~1960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의 민주혁명과 민주공화제 정착과정은 기본권적 자유, 참정권의 확대라는 기준으로도 재평가 된다.
첫째, 정부가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민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고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기관임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둘째, 표현의자유, 기회균등 및 평등수준, 거주이전.직업 및 종교의자유와 같은 기본권적 자유의 보장되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에서 누린 이러한 자유들은 그 이전의 시기나 동일한 조건의 다른 나라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셋째, 자유시장경제의 정착이다. 이승만정부는 국민의 재산과 자유시장적 경쟁과 거래를 보호하는 방향을 지향했다, 독재정부의 기본 특징은 지도자가 좌우할 정부 재산의 비중을 확대시키는 것으로 기업의국유화, 자원의국유화 및 무역규제로 나타난다, 그러나 민주주의자는 국민에게 재산 소유권을 부여한다. 이승만정부는 귀속재산의 처분, 국유토지의 불하, 국유재산인 주요 기업의 민영화를 하였다. 특히 ‘농지개혁’ 으로 귀속농지를 농민에게 불하함으로써 자기 토지를 소유하게 하여 재산권을 갖게 함으로써 근대적 자유경제의 근간을 확립시켰다.
독재는 국민의 자유를 빼앗고 국민의 재산을 유린하는 체제를 말하는데, 오히려 1948년 이후 구체적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고 보장받는 거대한 비약을 능가하는 인류의 다른 예를 찾아 볼 수 없다.
기본권적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것이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북한,중국,베트남같은 나라는 왜 이런 것이 보장되지 않는가?
4) 민주적 참여의 확대과정이었던 1948~1960
민주주의의 핵심은 정치참여다. 이승만 정부는
첫째, 민주적 선거제도를 보장했다,
독재자는 국민으로부터 평가받거나 책임을 져야하는 선거를 거부한다. 강압적 선거(ex.북한)나 포퓰리즘체제가 아닌 이상 자유선거와 독재는 양립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승만 통치 시기 제헌의회 선거를 포함 총 11회의 전국선거가 진행되었다, 이 정기적선거가 계속되었다는 것은 국민 대표자에 대해 책임을 묻고 선택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민주제도가 정착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둘째, 정치적 자유경쟁제도의 정착이다.
정당(1948년 당시 제4당까지 존재)과 사회단체의 결성과 경쟁이 무한대적으로 자유로웠고 포현의 자유가 광범위하게 허용되었다. 신생독립국의 혼란이라 볼 수 있는 모습은 있어도 결코 독재의 모습은 없었다.
셋째, 정치적 반대자 및 경쟁자에 대한 배제의 수준
제4대 경쟁자로 볼 수 있던 조봉암이 공산체제와의 연루문제로 사형선고를 받고 사망한 것은 민주주의의 미성숙 현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여운형, 장덕수 등 많은 인사들이 테러 대상이 되는가 하면, 공산체제와 전쟁을 겪으며 수백만이 사상당하는 정치적 격변기의 혼란적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은 민주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와 치열한 대립 현상의 결과이기도 했다. 초기 민주주의 정착 과정에서 미성숙과 사회 혼란의 모습이었던 것이지 특정지도자의 독재적 행동 때문이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다.
5) 전체주의 추종자들이 만든 ‘이승만독재자’론
사람들이 이승만을 반민주 독재자로 규정짓는 평가의 근거는 ‘개헌을 통한 장기집권’, ‘3.15 부정선거’, ‘경쟁자 조봉암 사형선고’ 이 세가지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 몇가지의 비교기준을 갖고 재평가 해야한다.
먼저 ‘개헌을 통한 장기집권’에 대해서는 신생국이며 개발도상국의 민주공화제 초기시기의 과잉되고 미숙했던 측면으로 평가될 수 있지만 독재적 지도자로 평가될 만한 것인지의 여부다, 당시는 전반적인 민주주의 도입과 정착시기로 남북 간 전쟁과 대치 상황에서 안정적인 국민 국가형성의 문제로 볼 사항이지 이승만 개인의 독재체제 구축이라는 기준으로 볼 것은 아니다. 또 주변국 내지 체제였던 김일성(46년), 마오쩌둥(27년), 장제스(47년)과 비교했을 때 매우 짧은 것으로 독재로 평가되거나 상징될 수 없다.
또 ‘3.15 부정선거’에 대해서, 이것은 대통령 선거가 아닌 부통령 선거였다.
다만 상대 정당의 후보자가 부통령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부정선거를 방치한 것에 대한 책임으로 4.19에 따른 국민요구에 물러났다.
모든 독재자는 폭력을 무자비하게 행사한다. 수천만을 처형한 마오쩌둥이나 수백만을 처형한 김일성이 대표적이다. 독재자는 반대자들에 대해 폭력적 진압이란 방식을 선택하지 스스로 물러나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미숙했던 민주체제를 인정하고 스스로 물러난 이승만을 독재자라고 할 수는 없다,
‘경쟁자 조봉암 처형’ 관련해서는 공산체제라는 전체주의와 극단적으로 대치되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로 자유민주적 경쟁의 대상이었던 신익희, 조병옥과는 차원이 다른 성격의 것이다.
자유와 재산의 박탈, 집단적 학살, 광범위한 공포정치 내지 정치적 격리 및 정치수용소가 운용된 바도 없다.
결국 독재로 규정짓고자 하는 요소는 도덕적평가, 민주주의의 운용수준의 미성숙성에 따른 평가에 의한 것이지 그것이 독재였다고 평가될 수는 없다.
6) 한국 민주주의 혁명가였던 이승만 (이승만 통치 민주주의 평가)
이승만 통치 민주주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도입 및 성숙과정에 대한 인식이 우선되야 한다.
첫째, 서유럽 수준의 이념형적 기준을 설정하고 그 기준에 충족되지 못했다고 당시의 모든 지도자가 독재자로 평가 될 수는 없다,
둘째, 이승만 통치기인 1955년 기준으로 국민소득, 기업, 대학, 정당 등이 세계 70위 전후 수준에 있는 상황에서 정치수준만 홀로 세계적 수준에 있지 못했냐는 평가는 과도한 것이다. 사회경제수준(낮은 소득, 높은 문맹률, 낮은 평균수명, 낮은 기업경쟁률 등)과 정치수준은 분리되어 진행 될 수 없다. 그 수준을 달리하는 민주주의 지도자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승만의 정치철학, 국가지도력 수준 및 민주주의에 대한 정립 노력은 다른 모든 영역에서의 한국사회 경제적 수준과 차원을 달리하며 앞서 나갔다.
셋째,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비교접근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동일한 수준의 타국 지도자, 다른 국내 지도자)
2차세계대전 이후 1948년 전후하여 출범한 세계의 대다수 지도자 중에 이승만의 업적이나 지도자적 능력을 갖췄다고 평가되는 사람은 찾기 어렵고, 한국을 이끌 다른 지도자를 생각해 볼때(김구, 여운형, 박헌영, 김일성) 이승만보다 더 근대적 민주주의를 만들어내고 민주정부를 운영할 수 있는 지도자를 찾기 어렵다.
넷째,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자의 구체성은 추상적 당위에 있지 않고 독재와 전체주의의 투쟁에 대한 기여와 역할로 평가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체제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활동을 할 때 민주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전쟁, 물리적 폭력, 테러를 자행했던 공산주의 체제와 선두에서 투쟁했던 지도자가 명실상부한 민주주의자다. 전체주의와 싸운 반공 민주주의야 말로 한국 민주주의의 구체성이다.
그럼에도 한국 학계, 정치계, 언론계 등 지식층을 중심으로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아니라 유독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것은 두가지에서 비롯되었다.
1.미국 또는 영국같은 이념형에 못미치고 비약을 못 이루었다는 평가고,
2.민족사회주의적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에 따른 부정적 평가다.
이 2번 형태를 잘 봐야 한다.
이승만 독재자론의 기원과 지속성의 대부분은 2번과 같다. 스탈린체제, 마오쩌둥과 김일성과 같은 방향으로 가지 못했냐는 차원의 문제제기며 이것은 공산주의나 전체주의를 의미하는 ‘인민민주주의’로 가지 못했다는 비판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승만을 ‘민중-민주-통일’에 반하는 지도자,독재자로 평가한다. 대표적으로 송건호, 리영희가 이승만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했으나 김일성에게는 그런 평가가 일절 시도되지 않았던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성공회대 김동춘교수는 ‘대한민국은 왜?’라는 책에서 “6.25전쟁은 통일전쟁”,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라고 한다. 반공 세력에게 “통일을 방해한 세력”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어떠한 통일을 원하는가? 김일성이 한국의 리더가 된 통일이었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평가, 주변국 및 신생도립국이나 개발도상국과 비교해 평가해야 한다. 그는 민주주의가 없고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했던 시기에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정착시켰다. 대한민국 70년사를 보고 신생국 지도자 모두를 비교 분석했을 때 이승만보다 더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받을 지도자는 찾을 수 없다.
▲ 4.19 직후 서울대학교 병원의 시위 사상자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
다친 학생들을 보고 그는 울음을 터뜨린다. (해당 영상은 2015년에야 대중에 공개되었다.)
[출처] 이승만 깨기 (저자: 김광동) 발췌요약 6.이승만은 독재자?|작성자 dkenl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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